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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유적

오시수 신도비(吳始壽 神道碑)
  • 소재지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232-2
  • 지정일1997-06-05
  • 규모높이 우측비 243㎝|좌측비 149㎝, 너비 우측비 124㎝|좌측비 55㎝
  • 조성시기조선 후기

소개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남동쪽의 큰길가에 세운 석비(石碑)를 말한다. 오시수 신도비는 두 기가 존재한다. 우측의 비는 1694년(숙종 20)에 세워진 것이고, 좌측의 비는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에 연루되어 추탈되었던 오시수(吳始壽, 1632~1681)의 관작이 1784년(정조 8)에 신원·복관되자 오시수의 증손인 오석명이 1810년에 세운 것이다.

오시수의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이(德而), 호는 수촌(水邨)이다. 오시수는 1656년(효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4년(현종 5) 사복시정(司福寺正), 평안도암행어사를 역임했고 1674년에는 도승지가 되었으며, 숙종 대에 우의정을 지내기도 했다. 오시수는 동북오씨가 공주 월굴로 입향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인물로, 당시 동북오씨는 전성기라 칭할 만큼 번창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에 따라 동북오씨의 위상도 변화하였다.

오시수는 1680년 경신환국에 연루되어 귀향을 갔다가 1681년 사사되었으며, 이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복관되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옥사로 오시수의 관직이 다시 추탈되고 동북오씨의 정치적 수난은 계속되어 결국 공주로 입향하여 정착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런 배경 속에 오시수의 우측에 있는 신도비가 1694년 세워졌으며, 좌측의 비는 1694년 갑술옥사에 연루되어 추탈되었던 오시수의 관작이 1784년(정조 8)에 신원·복관되자 오시수의 증손인 오석명이 세운 것이다.

신도비는 나란히 두 기가 존재한다. 우측에 있는 비는 1694년(숙종 20)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 높이 243㎝, 폭 124㎝, 두께 54㎝, 자경은 2.5㎝ 정도이다. 좌측에 있는 비는 1810년(순조 10)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 높이 149㎝, 폭 55㎝, 두께 39.5㎝이다. 이 두 개의 비는 비대와 옥개형의 비개를 갖춘 동일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